
1. 인 구
- 우즈베키스탄의 인구는 현재 2,778만 명으로 100여 개 이상의 다민족으로 구성
- 러시아인은 주로 타슈켄트 외곽 및 공업 중심지에 거주, 타직인은 부하라와 사마르칸드에 밀집, 카라칼팍인(50만 명)은 자치공화국을 이루어 거주
- 우즈벡인은 대부분 농촌에 거주하고 도시 거주 우즈벡인은 40%를 약간 상회하며, 인구 성장률을 연 3.5%로 높은 편. 고려인은 약 16만 명으로 타슈켄트에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 전국에 걸쳐 넓게 분포
※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
[고려인 이주 경로]
•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 우즈베키스탄은 유목지대로 농업이 불가능하다고 인식되던 곳이었으나, 고려인들이 강제이주 시 가져온 볍씨 등 농작물 씨앗으로 수자원을 이용한 벼농사 등을 성공시키고 대규모 목화밭을 일굼
• 콜호즈(집단농장)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여 ‘김병화 콜호즈’와 ‘뽈리따젤 콜호즈’ 등을 건설, 노동영웅들을 배출
•고려인의 높은 교육열로 많은 고려인 2,3세들이 의사, 기술자, 교수, 연구원, 변호사, 당 간부 등 러시아 사회의 중심으로 진출
(*고려인 동포 주요인사로는 박 베라(상원의원), 신 블라디미르(고려문화협회 회장) 등 민주평화통일 해외자문위원 16명이 있음)
• 1991년 소련 붕괴 후 강대국 소련의 붕괴와 새로운 독립국가연합의 출현은 이미 형성돼있던 고려인 민족공동체의 핵분열 초래
•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90년대 중반 이후 대부분의 농업기반을 우즈벡 민족에게 넘겨준 많은 고려인들이 새로운 농업 환경, 일자리를 찾아 떠났고 지금도 그 행렬은 계속되고 있음
• 최근 우즈벡 정부 조사에 따르면 고려인은 모두 15만 5900명(전체인구의 0.6%)으로 80년대 23만 명에 비해 크게 감소
• 주 우즈벡 대사는 고령 고려인들을 위한 양로원 건설, 젊은 세대를 위한 직업기술훈련센터 건립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 중
※ 고려인 집단 농장 (콜호즈)
1. 김병화 콜호즈 (1925 창설, 1974년 김병화 농장으로 개칭)
-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당시 최초 정착하였던 지역의 하나로 당시에는 갈대밭이었으며, 김병화가 1940-74년간 농장 대표자를 역임하면서, 주재국 고려인 중 유일하게 2차례나 노동영웅훈장을 수훈
- 대표적인 고려인 집단농장이었으나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농장이 해체되어 개인 영농화하는 과정에 있으며, 다수의 고려인이 떠나 현재는 약 1,000여명의 고려인만 거주
2. 뽈리따젤 콜호즈(1924 창설, 농장 장은 카자흐인)
- 김병화 콜호즈와 비견되는 대표적인 고려인 집단 농장
- 1953년 황만금이 농장의 대표로 취임하여 전 소련 지역에서 가장 높은 생산량을 기록, 노동영웅훈장을 수훈
- 한때 최고 11,000여명의 고려인이 거주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5-6천명 정도로 추정
2. 언 어
- 구 소련 시절 러시아어와 우즈벡어가 공용어였으므로, 인구의 82%가 우즈벡어를 사용하고 인텔리 계층을 중심으로 인구의 50%이상이 러시아어를 구사
- 1991년 독립 이후 우즈벡어만을 공용어로 인정
- 우즈벡어는 차카타이어로부터 파생된 언어이며, 우즈벡어 명사의 70%는 아랍어 또는 페르시아어에서 차용되었고, 19세기 말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터 러시아어 외래어가 대폭 증가
* 구 소련 시절 아라비아 식 알파벳을 철폐하고 1935년부터 키릴문자를 사용하다 독립 후 99년부터 라틴 식 알파벳으로 표기
3. 종 교
- 공식 국교는 없으나, 국민의 약 88%가 이슬람 교도이며 이중 수니파가 대부분 (약 70%)
- 온건한 수니파가 다수를 점하고 있어 터키 계의 세속적 신앙 형태가 주를 이루고 있는 가운에 우즈벡 정부는 과격한 시아파 원리주의의 확산 차단을 위해 노력
4. 주요음식
[팔로브(Palov)]
1) 팔로브 (Palov)
Palov는 손님들이 오거나 잔치, 생일 등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만드는 우즈벡의 전통음식으로, 우즈벡인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민족이 즐겨먹는 음식이다. 우리나라의 볶음밥과 비슷하지만 기름을 많이 사용하여 요리한다. Palov는 지역에 따라 재료와 만드는 방법에 차이가 있으며, 그 이름도 100여 가지나 된다.
Palov에 들어가는 고기 중 제일 좋은 비계부분은 가장 맛있는 부분으로 존경 받는 사람에게 준다. 보통 음식은 여성들이 준비하지만, Palov만은 대부분 남성들이 요리한다.
[논(Non)]
2) 논(Non)
우즈벡 식탁에 빠지지 않는 주식으로, ‘탄드르’라는 벌집 모양의 큰 진흙가마에서 굽는 빵이다. 보통 원형모양으로 둘레가 두껍고 가운데는 얇고 편평하며, 표면에는 깨나 향신료를 뿌린다. 이 빵은 약간 질기고 쫄깃쫄깃한 것이 특징이다. 도시에는 동네마다 빵을 구워 파는 곳이 있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빵을 사서 먹기도 하지만, 농촌이나 도시의 단독주택에는 집안에 탄드르가 있어서 가정주부들이 거의 매일 빵을 굽는다.
우즈베키스탄에는 빵을 지칭하는 단어도 86가지나 되며, 빵을 매우 신성한 것으로 취급하여 빵을 만들 때에도, 보관할 때에도 정성을 다한다. 따라서 빵을 버린다던가 새들의 먹이로 주는 것과 같은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손님으로 초대받았을 때에는 주인이 빵을 찢어서(빵이 질기고 쫄깃쫄깃해서 찢는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나누어줄 때까지 기다리거나, 혹은 빵을 찢는 것에 대해 주인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
[카봅(Kabob)]
3) 카봅(Kabob)
샤슬릭이라고도 불리는 이 음식은 원래 카프카스에서 유래한 음식으로 꼬치에 양•소•닭고기•채소 등을 끼워 숯불에 구워먹는 음식으로 보통 양파와 함께 취식한다. 작은 고기 덩어리, 갈은 고기, 간, 감자 등 다양한 재료의 kabob이 있다.
[솜사(Somsa)]
4) 솜사 (Somsa)
밀가루 반죽을 만두피 빚는 것처럼 얇게 민 후 녹인 버터를 골고루 묻혀 달걀 말이 하듯 돌돌 말아 세모 또는 둥근 모양으로 만든다. 속에는 양파와 고기 다져 넣고, 오븐이나 가마에 구워낸다.
[수말락(Sumalak)]
5) 수말락 (Sumalak)
Sumalak은 주로 나브루즈(Navro’z)기간에 만들어 빵과 함께 먹는다. 3일 동안 밀을 뜨거운 방에서 매일 물을 주며 발아시킨다. 이때 여자들은 매일 몸을 정결히 하고 코란을 읽고 좋은 생각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정이 타서 맛있는 수말락이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3일 뒤 이것을 갈아서 밀가루랑 섞어 기름을 조금 두른 후 냄비(보통 큰 가마솥)에 조금씩 물을 부어가며 약 하루를 계속 눋지 않게 젓는다. 원래 수말락이라는 뜻이 ‘7명의 천사’를 의미한다. 그래서 요리할 때 7개의 작은 돌이나 호두를 넣고, 먹을 때 이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행운을 얻는다고 한다. 설탕을 넣지 않아도 달기 때문에 우즈벡 사람들은 밤에 천사가 몰래 와서 설탕을 넣고 갔다고 믿는다.
[초이(Choy)]
6) 초이 (Choy)
목이 마를 때에도, 손님이 와도, 기름진 음식을 먹은 후에도, 한여름에도 뜨거운 초이를 마신다.. 초이를 대접할 때에는 차주전자에 찻잎과 물을 따라 우려낸 후, 찻잔에 물을 따르고 다시 차주전자로 옮기는 행위를 세 번 반복한 후 마신다. 또한 찻잔에 초이를 따를 때에는 찻잔의 2/3 정도 따르는데, 이것은 차를 마시는 손님이 더 머무를 것을 청하는 환대의 표시이다. 찻잔에 초이를 가득 채우면 손님이 별로 반갑지 않으니 빨리 마시고 가라는 것을 의미한다.
5. 국경일
라마단 등 이슬람교 관련 경축일과 함께 여성의 날, 전승기념일 등 러시아CIS권과 유사한 국경일을 기념한다.
[주요경축일]
데이터 테이블
| 일자 |
국경일명 |
| 1월 1일 |
신 년 |
| 3월 8일 |
여성의 날 |
| 3월 21일 |
나브루즈 (새해,새봄맞이 축제) |
| 5월 9일 |
승전기념일 (2차 대전 대독 승리기념) |
| 9월 1일 |
독립기념일 (구 소련 분리 독립) |
| 10월 1일 |
스승의 날 |
| 12월 8일 |
제헌절 |
- 여성의 날(3.8): 1927년 3월 8일 우즈벡 지역에서 이슬람 여성들이 최초로 히잡벗기 운동을 시작하여 수만 명이 동참했고, 이후 이슬람 여성의 권익 향상의 시발점으로 작용하였다. 우즈베키스탄의 여성의 날은 남성들은 부인•여자친구를 위해 꽃 화장품 향수 등 선물을 준비하며, 여성들에게는 생일 다음으로 중요한 기념일로 여겨진다.
- 나브루즈 (3월 21일): 이슬람 국가에서는 새해맞이 축제로 기념되고 있지만 조로아스터교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며, 봄의 소생을 알리는 행사이다. 나브루즈 한달 전부터 거리에 축하 플래카드가 걸리고 공휴일은 하루지만 축제는 1주간 계속된다.
- 승전기념일 (5월9일): 대조국전쟁이라고 불리는 2차 대전 대독전 승리를 기념하는 날로, 전몰자들을 추모하고 참전용사를 위로하는 다양한 행사 개최한다.
- 독립기념일 (9월1일): 구 소련에서 분리 독립해 우즈벡 공화국이 탄생한 날로, 무스타클릭 광장(Musraqilik Maydoni)에서 대형 축하콘서트 등 성대한 기념식을 개최한다.
- ‘라마단 아이트’와 ‘쿠르반 아이트’: 이슬람교의 종교관련 경축일로, 한달 간의 라마단 금식일 종료 후 음식을 먹는 첫날이 ‘라마단 아이트’이며 70일 후가 ‘쿠르반 아이트’이다.
6. 주요도시
1) 타슈켄트 (Toshkent)
[타슈켄트의 모습]
투르크어로 ‘돌(타슈)의 도시(켄트)’란 뜻의 타슈켄트는 우즈베키스탄의 공식수도다. 타슈켄트는‘중앙아시아의 수도’라고 일컬어질 만큼 중앙아시아에서 인구(215만)가 가장 많고 지정학적으로도 중심에 있으며,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지하철이 있는 현대도시다. 타슈켄트의 이런 번영은 중세 이후‘이슬람의 성도’였다는 각별한 지위가 작용했다. 지금 중앙아시아 5개국은 90년대 초 옛 소련에서 독립해 저마다 이슬람 정체성을 되찾는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애초부터 국기에 이슬람의 상징인 초승달을 그려 넣은 나라는 우즈베키스탄뿐이다. 그만큼 우즈베키스탄은 이슬람에 깊이 훈육된 나라이며, 그 중심에 시종 타슈켄트가 있었다.
타슈켄트는 기원전부터‘차치’란 이름으로 알려진 오아시스 도시다. 자연환경이 유리한데다 교통요지여서 농경, 교역이 발달했다. 일찍부터 여러 종교가 공존했으며, 궁궐과 사원, 요새와 주택이 즐비했다. 이슬람 영향권에 들어간 것은 7세기 초부터다. 705년 중앙아시아의 서쪽 메르브에 입성한 이슬람 정복군은 10년도 채 안 되어 파죽지세로 시르다리야와 아무다리야 사이의 트란스옥시아나 전역을 점령하고 타슈켄트로 진격했다. 그러나 이 지역이 당시 당나라 판도 안에 들어가 있어 더 이상 동진은 못하고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렸다. 이 때 고선지가 이끄는 당 군이 쳐들어오자, 석국(타슈켄트)과 결맹해 당 군을 물리친다. 이것이 유명한 탈라스 전쟁(751년)이다. 석국-이슬람 연합군이 승리하자, 이슬람 문화는 타슈켄트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해 11세기 카라한조 시대에 본격적으로 개화한다. 그러다 13세기 몽골 군의 침입으로 된서리를 맞고 도시는 여지없이 파괴된다. 다행히 15세기 티무르 제국 출현을 계기로 ‘이슬람 르네상스’를 맞으면서, 타슈켄트는 성도로 떠오른다. 지금 남은 유적유물 대부분은 티무르시대(1405~1500)와 뒤이은 샤이바니 조 시대(1505~98)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타슈켄트는 상반된 이미지를 지닌 고도다. 8세기 이슬람의 동전 이후 지금껏 종교적 성도로 구실했지만 기원전부터 대상무역과 금은 세공으로 번영해 온 상도이기도 하다. 실크로드 오아시스 사이의 대상무역을 이었던 도시국가로서 타슈켄트의 영화는 쿠처에 버금갔다. 중국에서 타슈켄트의 옛 이름은 ‘석국(石國)’으로 불렸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이슬람 정벌 이전까지 ‘슬슬’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던 에메랄드 등 금속 보석 공예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푸른빛을 내는 에메랄드(벽석)의 유명한 산지도 바로 부근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타슈켄트의 상인들은 몽골과 신장 지역 등에서 산출된 금 등의 귀금속, 보석 등도 앞선 기술로 세공해서 교역을 주도했다. 자연스럽게 중개 도시로서 유리한 입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중국 문헌에 나오는 ‘자설국(者舌國)’, ‘자시’란 이름은 돌을 뜻하는 이란어 ‘차치’에서 연원 한 것으로 모두 보석, 금은 세공과 관련이 있다. 이런 이유로 타슈켄트는 중국, 투르크, 위구르, 타직, 소그드, 아랍인들 사이에 끝없는 영토싸움의 무대였다. 석국인들에게는 아랍권과 중국 왕조 사이의 교묘한 등거리 외교가 필수였다. 8세기 저 유명한 탈라스 전쟁의 도화선도 고선지가 이 지역을 침공한 데서 비롯되었다. 석국을 중심으로 한 소그디아나 일대의 소국들이 이슬람 권에 기울어져 당에 복종하지 않은 것이 고선지의 군사행동을 낳은 것이다.
2) 사마르칸드 (Samarqand)
[사마르칸드의 모습]
사마르칸드는 실크로드의 중심으로서 고대 호레즘시대부터 마라칸다로 알려졌고, 중국에서는 강국(康國)이라고 불렀다. 기원전 5세기경 자라프샨강 유역에 살던 소그드인들은 오아시스가 있는 아프라시압 언덕에서 도시를 건설했다. 그 후 사마르칸드는 수많은 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왔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기원전 4세기), 아랍인의 침략에 의해 세워진 사라센제국(8세기), 칭기즈칸의 침략(13세기) 등으로 이 도시의 주인공은 바뀌었다.
14세기에는 티무르 왕조가 몽골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 사마르칸드를 다시 부활시켰다. 티무르는 이 도시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해 원정을 떠나면 닥치는 대로 그 지역의 유명한 예술가와 건축가들을 끌고 와 아름다운 도시로 꾸미도록 지시했다. 특히 그는 푸른색을 좋아해 사마르칸드를 푸른 도시로 만들었다. 이런 이유로 사마르칸드를 '푸른 도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도시 곳곳에 산재한 중세 모스크와 왕족들의 묘들이 저마다 푸른색 돔을 머리에 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푸른색은 청록 빛깔의 터키석 장식이 연출해 내는 신비감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슬람 학자들은 사마르칸드를 '동방세계 이슬람의 진주'로 불렀다.
사마르칸드에서 가장 유명한 대부분의 유적들은 14, 15세기에 사마르칸드를 중앙아시아의 경제, 문화, 학문의 중심지로 만든 티무르와 그의 손자 울루그벡, 우즈벡 샤이바니드인의 작품이다. 거의 모든 명소가 그 구조가 옛날과 다르게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구시가에 위치하고 있다. 사마르칸드의 자랑거리이자 중앙 아시아에서 가장 경외심을 일으키는 것은 수 많은 마졸리카 도자기, 담청색 모자이크, 거대하고 아름답게 분할된 공간을 제공하는 메드레사를 가리는 웅장한 종합작품인 레기스탄(Registan)이다. 옆에 있는 대규모 집회를 할 수 있는 비비하늠 모스크사원(Bibi-Khanym Mosque)은 티무르 제국의 보석 같은 곳이었으며 황폐하더라도 힘이 넘치고 빈틈이 없다. 이 사원은 이슬람계에서 가장 큰 사원의 하나였으며 한계상황까지 건설기술을 추진했기 때문에 그 자체의 웅장함에 희생되어 수세기 동안 서서히 기울어져 1897년 지진으로 마침내 붕괴되고 만다.
사마르칸드는 현재 사마르칸드 주의 주도(州都)로서 인구 약 40만 명으로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이다. 공업 및 문화의 중심지로서 사마르칸드는 자랴프샨 강의 계곡과 구릉에 걸쳐 위치하며, 타슈켄트에서 자동차로 3시간 가량 걸린다. 우즈벡 과학원 고고학 연구소, 사마르칸드 대학, 기생충 학 연구소, 사마르칸드 시립박물관, 우즈벡 문화•예술사 박물관 등이 있고 교육, 문화의 중심 도시이기도 하다. 사마르칸드 시내에는 많은 사적이 있으며 최근 칭기즈칸의 군대에 의해 폐허가 된 구시가의 발굴이 이루어져, 아랍 침공(8세기) 이전의 궁전 터와 화려한 벽화 등이 출토되었다.
※ “아프라시압 벽화”
[벽화]
중앙아시아와 한민족의 역사적 교류의 증거물로서 아프라시압 벽화를 손꼽을 수 있다. 1975년에 알리바움은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과학원에서 발굴 보고서 '아프라시압 벽화'을 발표하여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는 아프라시압 벽화를 고증하는 가운데 한민족의 의상을 발견했다고 주장하였다.
"두 사람은 앞에 있는 사신들과 머리장식에서 구별된다. 첫 번째 사람은 머리에 차양이 없는 모자를 쓰고 있다. 또한 진주로 장식된 리번이 머리 둘레를 조이고 있고, 머리 꼭대기에는 두 개의 깃털이 꽂혀있다. 그의 머리는 짧고 검은색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얼굴은 밝은 색을 띠고 있다. 세부적으로 그림을 연구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레몬 색의 옷자락이 긴 옷을 입고 있다. 그리고 그 옷은 허리에 넓고 검은 띠로 주름이 잡혀있다. 밑으로 내려가서, 넓적다리에는 옷이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몸을 감싸면서 좁혀져 있다. 가벼운 비단으로 만들어진 넓은 바지는 부드러운 주름을 타며 복사뼈까지 내려져 있고 끝에는 줄로 묶어져 있다. 단화는 부드럽고 앞 끝이 댕겨져 올라가 있다. 손은 넓은 소매에 감추어져 있으며, 선물은 보이지 않는다. 넓적다리 부분에는 왼쪽 방향으로 곧바로 꽂힌 칼이 있다. 칼집 위로는 하트모양을 가진 두 개의 고리가 있는데, 이는 칼을 고정시키기 위해 허리에 있는 검은 띠와 두 줄로 연결되어 있다. 두 번째 사신도 똑같은 옷을 입고 있다. 그의 옆 얼굴은 밝은 갈색을 띠고 있으며, 코는 약간 낮다."
알리바움은 이 사신들의 새 깃털이 꽂힌 머리 장식을 보고 이들의 국적을 고구려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 당시 한민족이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왕래를 했다는 것은 매우 감격적인 사건이다. 이 당시에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 또한 당과 실크로드를 통한 많은 교류를 하고 있었다. 한국의 고려시대는 국제무역이 매우 발달하여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이 고려를 방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 부하라 (Buhoro)
[부하라의 모습]
부하라는 서역으로 가는 좁은 ‘목구멍’이었던 둔황과 지정학적으로 비슷하다. 아랄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의 정수리’ 호라산 지역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어 일찍부터 실크로드 간선인 초 원로와 오아시스 육로의 교차점이 됐다. 동쪽의 중국과 서쪽의 페르시아•유럽 쪽 문물들이 부하라에서 한데 모였다가 각지로 전파된 까닭에 숱한 지역 왕조들의 도읍이 되었으며, 이민족 상인들 사이에는 경제적 패권의 각축장이 되었다. 특히 부하라는 동유럽•중동에서 중국으로 갈 경우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에 있어 실크로드가 쇠퇴하는 17세기 이후에도 중계 교역으로 쉼 없이 번영을 누렸다. 오늘날 부하라가 동서 교류의 우량 박물관이 된 것은 20세기 초까지 2000년 이상 유지된 교역 망 덕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원래 5세기까지 부하라는 인도의 불교유적이나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유적을 찾았던 순례자들의 중간 기착지였다. 중국사서인 <수서>서역전에는 7세기 초 수나라가 서역에 파견한 사신 위절의 기행기 <서번기>의 내용 일부가 나오는데, 안국으로 불렸던 부하라는 다섯 빛깔 소금인 오색 염이 중요 교역 품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격적인 교역거점이 된 것은 6세기 투르크족이 진출해 부하라 성과 궁전, 창고, 시장 등을 지은 데서 비롯됐다. 8세기 초 아랍 이슬람 군대가 호라산을 점령한 이래 지배세력은 200~300년 단위로 바뀐다. 거란인들이 주축인 카라키타이(12세기 초), 몽골인들의 차가타이한국(13~14세기), 티무르 제국(14~15세기),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뿌리인 우즈벡인의 샤이바니왕조와 부하라 한국시대(16~19세기)까지 교역은 끊이지 않았다. 대항해 시대인 16~17세기에는 유럽인들도 중국 진출을 위한 동방 거점으로 부하라를 점 찍고 무역사절을 보낸다. 제정러시아의 거상 스트로가노프가의 에르마크나 영국 런던의 무역상 젠킨슨이 바로 그런 이들이다. 젠킨슨의 경우 1558년 12월 부하라에 도착해 현지 교역시장을 견문한 기행기를 남겼다. 당시 부하라 시장에서는 인도 벵골의 마포와 모직물, 러시아산 가죽, 페르시아 직물, 중국 비단, 견직물 등이 거래됐고, 페르시아인, 러시아인, 타타르인들을 사고파는 노예시장도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4) 히바 (Xiva)
[히바 (Xiva)]
히바는 우즈베키스탄 서 남부에 위치한 투르크메니스탄 국경 도시다. 투르크메니스탄의 카라쿰과 우즈베키스탄의 키질쿰 중간에 위치하여 옛날 실크로드의 중요한 오아시스 역할을 했으나 사나운 도적떼가 수시로 출몰하여 위험한 지역이기도 했다. 16세기부터 17세기 초까지 히바 칸국의 수도역할도 했으나 아스타라칸 속국으로 있다가 1873년 러시아군의 침입으로 완전히 주권을 잃은 후, 1924년 소연방 우즈벡으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히바의 유적은 히바성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고 히바성은 동서남북 문을 포함 11개의 출입구를 갖고 있다. 히바성 안에는 50여 개의 유적과 250여 호의 고가(古家)가 있어 성내는 모두가 문화유적이다.